홀로서기를 준비하며 (서어권, 박하나)
- Author: 국내교육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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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n 15, 2021 6:53 PM
홀로서기를 준비하며
박하나
어린 시절부터 언어와 문화에 관심이 많아외국어를 배웠다. 스페인 유학 중 역설적으로 한국과
한국어의 매력에 눈을 뜨고 외국어로서의 한국어를 연구하다가 한국문학번역까지 꿈꾸게 되었다.
합격소식을 들은 순간 나는 펄쩍 뛰어올랐다.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발을 구르며 꺅 소리를 내질렀다. 첫 문장부터 막막했던 필기시험과 긴장으로 뒷목이 뻐근했던 면접을 통과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자축의 시간은 짧았고, 지원 전부터 나를 옭아매던 불안감이 엄습했다. 과연 내가 한국문학을 스페인어로 번역할 수 있을까? 스페인문학을 한국어로 옮기는 것도 아니고,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그것도 문학을 번역한다는 게 내 능력에 가당키나 한 일일까?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첫 학기 번역 실습과 문체 실습 수업을 받으면서 나는 내가 오르지 못할 나무를 넘보았다는 좌절을 느꼈다. 매시간 나 자신의 부족함과 마주했다. 수업도중에 눈물이 고인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나는 그 과정이 좋았다. 원문을 읽고 또 읽으며 나름대로 뜻을 해석해서 머리를 쥐어짜 새로운 언어로 풀어내는 그 모든 과정이 흥미로웠다. 잘하든 못하든, 나는 번역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게다가 원어민이 아니라는 게 마냥 약점은 아니었다. 한국어는 스페인어를 비롯한 다른 언어들과 구별되는 언어적 특징이 많다. 주어나 목적어가 수시로 생략되고, 성(Gender)과 수(Number)가 명시되지 않으며, 다양한 조사와 어미를 통해 문장의 의미는 물론이고 행간에 담기는 미묘한 분위기까지 암시한다. 높임말과 지역 방언의 벽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원문의 문맥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한국어 원어민인나 밖에 없었다. 그걸 스페인어로 속 시원히 풀어내지 못하는 게 나의 문제지만, 한국어라는 벽 앞에서 고민하는 건 외국인 동기들도 마찬가지니 세상은 참 공평하다.
번역아카데미 정규과정의 학생들은 학기마다 번역 수업 2개 외에도 한국문학과 관련된 수업 3개를 들어야 한다. 연수장학금을 받지 않는 일반지원자인 나는 문학사수업 1개만 들으면 되는데, 한국인이 듣기에도 어려운 문학사를 멍하게 듣고 있는 친구들을 보고 있으면 내 오른쪽 귀로 들어가 왼쪽 귀로 그대로 흘러나오던 라틴어 수업이나 스페인 중세 문학 수업이 떠오르곤 했다. 그러다가 나보다 해박한 배경지식으로 유려하게 발표하는 외국인 친구를 볼 때는 감탄과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상은 넓고 대단한 사람도 많다.
번역아카데미 정규과정은 스페인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5개언어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과 동기들을 모두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문학사 수업 시간에만 있는 게 아니다. 한국문학번역원에서는 한 학기에 한 번 문학기행을 통해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체험을 마련한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이후 아주 오랜만에 3박4일 동안 버스를 타고 여행을 떠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수업시간 외에는 어울릴 기회가 적었던 같은 과 동기들과 더욱 돈독해지고, 문학 기행이 아니면 말 붙일 기회가 없을 다른 과 다른 학년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친구들은 한국을 배우는 시간이었겠지만, 나는 외국인 친구들이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걸 놀라워하는지 바로 곁에서 지켜볼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 아침부터 생선구이가 나온다고 신기해 하는 친구를 신기해 하며 그 친구가 손도 안 댄 생선까지 대신 먹어치운기억이 난다. 13기부터는 중국어와 일본어 과정이 신설된다고 들었는데 분위기가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하다.
2년이라는 긴 시간이 금세 흘러가 버렸다. 특히 우리 11기의 마지막 학기는 전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존재하는 시대에 맞이한 역병이라 모든 수업은 화상강의로 무사히 대체되었으나 그래도 아쉽다. 문학기행도 못 가고 다양한 주제의 특별강의도 다 취소되었다. 아카데미 수료 후 비자가 만료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하는 대다수의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 못 본 채 헤어지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현재로서는 모두의 건강이 최우선이지만, 마지막 수료식이라도 오프라인으로 진행할 수 있는 상황이 되길 바란다.
번역아카데미에서의 배움과 경험은 나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내 인생에 이런 기회가 또 주어질까 싶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시간이었다. 특히 교수님들과 번역원 직원 분들께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 스페인어권 교수진은 모호한 두 언어의 차이를 명쾌하게 짚어내고, 나의 좁은 시야를 넓혀주고, 수업 외적으로도 도움을 아끼지 않는 능력자들이시다. 그리고 이곳처럼 학생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가능한 한 모든 요구를 신속하게 반영해 주는 기관은 처음 보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발전해 나갈지 기대된다.
지금부터는 온전히 나의 노력이 필요하다. 번역아카데미에서 공부하는 모든 사람이 문학번역가가 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한국문학을 세계에 알릴 수 있다고 상상하면 설렌다. 함께 공부한 친구들 중에는 벌써 번역상을 받거나 출간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덕분에 나도 기분 좋은 자극을 받는다. 지금 내가 붙들고 있는 이 문장이 언젠가는 지구 건너편 누군가의 눈 앞에 펼쳐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오늘도 한 땀 한 땀 번역의 수를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