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과정 (영어권, 소피 보우만)
- Author: 국내교육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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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n 15, 2021 7:02 PM
끝나지 않는 과정
올해 6월 19일¹이면 한국문학번역원 번역아카데미 정규과정에서 수료한지 7년이 된다. 날짜를 확인한다고 그날 사진을 찾아봤는데, 나의 여드름 많은 앳된 얼굴에 깜짝 놀라기도 하고, 수료식에 참석해줬던 친구들 그리고 나를 가족처럼 대해주신 친구의 부모님과 찍은 사진에 새삼 감동에 빠졌다.
2012-13년, 1년여 시간 동안 나에게 많은 일이 있었다. 인턴으로 있던 사무실을 떠났고, 부모님의 첫 한국 방문을 계획해서 가이드 역할도 하고, 훗날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석사 지도교수님이 되실 분도 처음 만나고, 한국인 친구와 크리스마스에 영국여행도 다녀오고, 당시 대통령의 참석으로 아주 묘했던 광주 5.18 기념행사도 군중의 한 사람으로 경험하고, 번역아카데미 정규과정이 거의 마무리 되던 무렵 지리산에서 지금은 나의 배우자가 된 사람을 처음 만났다. 그런 한편, 번역아카데미에서 정규과정에서 문학 번역을 공부했다. 번역실습을 통해 한-영 번역은 가능하지만 어렵고, 또 작품에 따라 제각기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정규과정을 마치고 7년 동안 나는 환경 연구원에서도 근무하고, 이화여자대학교에 진학해 국어국문학과 석사 공부를 마치고, 번역아카데미 특별과정과 번역아틀리에 과정도 다니고, 프리랜서 번역가로 일했다. 그리고 2년 전, 동아시아학 박사 공부를 하기 위해서 배우자와 함께 캐나다로 왔다. 그렇게 나의 20대를 서울에서 보내고 이제는 30대를 토론토에서 보내고 있다.
내가 아주 조금씩 밟고 나아가는 이 길로 봐서는 배움이란 끝이 없고 번역가가 되어가는 과정은 뭔가 도착지 없이 계속 이어나가는 일이다. 번역을 오래한 사람일수록 잘 할 확률이 높아질 순 있지만, 언제부턴가 쉬워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다만 가능해진 것, 그리고 고민의 지점들이 조금 섬세해진 것으로 봐서 나의 경력들이 의미 없지는 않다고 스스로 위로할 수 있다.
정규과정을 수료한지 7년이 돼서야 올해 10월에 나의 첫 해외출판 번역서가 나온다. 그리고 더 먼저 작업을 마친 나의 진짜 첫 번역서는 내년 봄에 영어권 독자들과 만나게 된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이 두 작업을 통해서 번역의 힘을 새삼 느끼고 있다. 그 중 “손자들을 위한 그림” 인스타그램 계정의 운영자인 이찬재 할아버지와 안경자 할머니의 첫 책² 영어번역 작업을 함께 하면서, 미국에서 자라게 될 노부부의 손주들이 언젠가 그 책을 읽게 될 것을 깨달았던 순간만큼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란 걸 확신한 적이 있을까.
나의 진짜 첫 번역서인 「스텔라 오디세이 트릴로지³」의 한글판 겉표지에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미국과 영국 동시 출간 결정! 미국 최대 출판사 하퍼콜린스의 선택!” 이 홍보 문구를 읽으면서 나의 작업은 영어권 독자들에게 나가는 것이지만,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영어권 번역출판이라는 사실 자체의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리고 내가 번역한 원고를 가지고 만든 출판 계약이란 사실은 신기하지만, 스토리가 대단한 작품이니 더 넓게 퍼져가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나의 기술을 이바지해서 뒤돌아보면 분명하게 번역되어야했던 책이 또 다른 삶을 이어가는 것을 보면 더 없이 흐뭇하다.
하퍼 콜린스에서 출간될 책 『I’m Waiting For You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에 내가 번역한 「스텔라 오디세이 트릴로지」 중 두 중편소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와 「당신에게 가고 있어」도 있지만, 영어권 시장을 위한 책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김보영의 별도 장편소설인 『저이승의 선지자』를 포함하기로 했다. 장편소설인 만큼 『저이승의 선지자』가 이 영어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그러나 출판 계약을 하는 과정에서 『저이승의 선지자』도 번역해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조금 좌절했다. 왜냐하면 나의 능력으로 번역이 불가능한 소설(읽은 사람은 얼마나 어려운 작업이었을지 짐작하리라 생각한다)이란 게 어쩔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번역아카데미 특별과정과 번역아틀리에 동기인 류승경 번역가가 그 작품을 맡게 되면서, 또 다시 번역 실습으로 어지러웠던 시간을 함께 보낸 동료 번역가와의 인연들만으로도 다 의미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난 7년 동안 난 뭐 한 것 있나 생각할 때도 있었는데, 이렇게 돌이켜보면 그래도 나의 번역 기술과 능력이 천천히 숙성되고 있었고 소중한 사람들과의 추억과 업적을 조금씩 쌓여 있었다.
¹ 2020년 작성일 기준
² 이찬재 할아버지와 안경자 할머니는 2015년 4월부터 손자들을 위한 그림(@drawings_for_my_grandchildren) 계정을 운영하면서 전 세계 40만 팔로워를 둔 ‘파워 인플루언서’가 되었다. 지난 해 손주에게 보내는 이 편지들을 모아 그림 에세이 『돌아보니 삶은 아름다웠더라』가 출간됐다. 이 책은 올 10월 Tarcher Perigree 출판사에서 『Looking Back Life Was Beautiful』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편집주)
³ SF소설가 김보영의 「스텔라 오디세이 트릴로지」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2015). ‘당신에게 가고 있어’(2020), ‘미래로 가는 사람들’(2010)로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소피 바우만 번역가가 영어로 번역하여 출간될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와 ‘당신에게 가고 있어’ 연작은 지난 해 미국 최대 출판그룹인 하퍼 콜린스가 출판 계약을 체결하여 관심을 끌었다. 서희원 문학평론가는 이 3부작을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스탠리 큐브릭과 아서 클라크 공동 작업으로 제작된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용어를 빌려와 ‘스텔라 오디세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편집주)
- 홀로서기를 준비하며 (서어권, 박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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